but let a sufferer try to describe a pain in his head to a doctor and language at once runs dry.’
고통받는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머릿속 통증을 설명하려 하면 언어는 즉시 메말라버리고 만다.’
울프 인용구의 마무리야. 사랑할 땐 시인들을 빌려오지만, 머리 아파 죽겠을 때 의사한테 가면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지. 언어가 '메말라버린다(runs dry)'는 표현이 정말 절묘하지 않아? 우물이 마르듯 할 말이 뚝 끊기는 거야.
And we’re such language-based creatures that to some extent we cannot know what we cannot name. And so we assume it isn’t real.
우리는 언어에 기반한 존재라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버린다.
싱 박사님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콕 집어 말하네. 이름표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취급하는 우리 인간들의 얄팍함이란! 에이자의 그 말로 설명 못 할 고통이 왜 무시당하는지 철학적으로 풀어주시는 중이야.
We refer to it with catch-all terms, like crazy or chronic pain, terms that both ostracize and minimize.
우리는 그것을 ‘미친’이나 ‘만성적 통증’ 같은 포괄적인 용어로 지칭하는데, 이런 용어들은 대상을 소외시키는 동시에 그 가치를 깎아내린다.
'미쳤다'거나 '만성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박사님이 일갈하고 있어. 그냥 대충 다이소 바구니 같은 용어에 싹 쓸어 담아 부르는 게 정작 아픈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는다는 거지.
The term chronic pain captures nothing of the grinding, constant, ceaseless, inescapable hurt.
‘만성적 통증’이라는 용어는 갉아먹는 듯하고, 끊임없으며, 쉼 없이 이어지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만성'이라는 두 글자가 가진 무게감이 실제 고통에 비해 너무 가볍다는 거야. 맷돌로 영혼까지 갈아버리는 듯한 그 생생한 아픔을 단어 하나가 어떻게 다 설명하겠어? 박사님의 어휘력이 폭발하는 장면이지.
And the term crazy arrives at us with none of the terror and worry you live with.
그리고 ‘미친’이라는 말은 네가 안고 살아가는 공포나 걱정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에이자가 느끼는 지옥 같은 공포를 세상 사람들은 그냥 '미쳤네' 한마디로 치부해 버린다는 거지. 그 말 한마디가 우리 귀에 들릴 땐 정작 에이자가 겪는 그 공포의 '공' 자도 안 묻어 나온다는 박사님의 예리한 지적이야.
Nor do either of those terms connote the courage people in such pains exemplify,
또한 그 두 용어 중 어느 것도 그런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 몸소 보여주는 용기를 함축하지 못한다.
싱 박사님이 진짜 멋진 말씀을 하시네. '미쳤다'거나 '만성 통증' 같은 딱지들이 정작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매일 견뎌내는 사람들의 '용기'는 쏙 빼놓고 말한다는 거야. 아픈 게 죄도 아닌데 단어 선택부터가 사람을 소외시킨다는 박사님의 일침, 완전 공감이지?
which is why I’d ask you to frame your mental health around a word other than crazy.” “Yeah,” I said.
그것이 내가 네 정신 건강을 ‘미친’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로 규정하라고 권하는 이유다.” “네,” 내가 대답했다.
박사님이 에이자한테 '미친'이라는 단어라는 감옥에 갇히지 말고, 네 투쟁을 더 잘 설명해 줄 멋진 단어를 찾아보라고 제안하시네. 근데 에이자의 '네(Yeah)'는 진짜 수긍했다기보다 '아... 네, 뭐 그러시든가요' 하는 영혼 없는 사춘기 학생의 반응이라 좀 짠해.
“Can you say that? Can you say that you’re courageous?” I screwed up my face at her.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니? 네가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어?” 나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박사님이 드디어 '용기(courageous)'라는 단어를 에이자 입으로 직접 뱉어보라고 유도하시네. 근데 에이자는 이런 오글거리는 치료법이 너무 싫은가 봐.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는 게 거의 민트초코 처음 먹어본 사람 표정인데?
“Don’t make me do that therapy stuff,” I said. “That therapy stuff works.”
“그런 상담 치료 같은 건 시키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그런 치료법들이 효과가 있단다.”
에이자가 '자, 따라 해 봐! 나는 용감하다!' 같은 오글거리는 상담 기법에 강력하게 저항하네. '그런 짓 시키지 마세요(Don't make me do...)'라며 철벽을 치는데, 박사님은 여유롭게 '그거 원래 효과 좋아'라며 맞받아치셔. 베테랑 상담사와 사춘기 환자의 팽팽한 티키타카가 느껴지지?
“I am a brave warrior in my internal Battle of Valhalla,” I deadpanned. She almost smiled.
“나는 내면의 발할라 전투에서 싸우는 용감한 전사다.” 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미소 지을 뻔했다.
박사님이 용감하다고 말해보라니까 에이자가 아주 비꼬는 말투로 '발할라의 전사' 드립을 쳤어. 북유럽 신화까지 끌어다 쓰는 에이자의 냉소적인 유머 감각에 박사님도 하마터면 피식할 뻔한 거지. 에이자의 이런 엉뚱한 방어 기제, 은근히 매력 있지 않아?
“Let’s talk about a plan to take that medication every single day,” she said,
“매일 그 약을 복용하기 위한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녀가 말했다.
농담은 여기까지! 박사님이 다시 진지 모드로 돌아와서 약 복용 계획을 세우자고 하시네. 에이자가 약을 제때 안 챙겨 먹는 걸 이미 꿰뚫어 보고 계신 거야. 역시 베테랑 상담사는 속이기 힘들다니까.
and then proceeded to talk about mornings versus evenings, and how we could also try to get off the medication and try a different one,
그러고 나서 아침에 먹을지 저녁에 먹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약을 끊고 다른 약으로 바꿔볼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이냐 저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박사님이 약 먹는 시간대부터 약 종류를 바꾸는 방법까지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계셔. 에이자가 약을 더 잘 먹게 하려고 온갖 옵션을 다 고민해 주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