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 I have to look at life uniquely now. Let’s face it.”
"글쎄, 난 이제 삶을 독특하게 바라봐야만 해. 현실을 직시하자고."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평범한 시각으로 살면 너무 괴롭잖아? 그래서 교수님은 스스로 살기 위해 '독특한 관점'을 선택하신 거야. 'Let's face it'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교수님의 결연함이 느껴지는 말이지.
“I can’t go shopping, I can’t take care of the bank accounts, I can’t take out the garbage.”
“쇼핑도 못 가고, 은행 계좌 관리도 못 하고, 쓰레기도 못 내다 버려.”
교수님이 이제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니까 일상적으로 하던 귀찮은 일들조차 할 수 없게 된 상황이야. 근데 들어보면 은근히 '합법적 땡땡이' 같은 느낌도 나지 않아? 쓰레기 안 버려도 되는 건 좀 부럽다 그치?
“But I can sit here with my dwindling days and look at what I think is important in life. I have both the time—and the reason—to do that.”
“하지만 난 줄어드는 내 남은 날들과 함께 여기 앉아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 내게는 그럴 시간과 이유가 둘 다 있거든.”
교수님의 긍정 회로가 풀가동되는 시점이야. 육체적인 건 포기했지만, 대신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 통찰'의 시간을 얻었다는 거지. 해탈의 경지에 오르신 것 같아.
So, I said, in a reflexively cynical response, “I guess the key to finding the meaning of life is to stop taking out the garbage?”
그래서 난 반사적으로 시니컬하게 대답했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열쇠는 쓰레기 버리기를 그만두는 것에 있나 보네요?”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지니까 미치가 참지 못하고 '아재 개그' 섞인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는 거야. 교수님이 쓰레기 못 버린다고 하시니까, 그럼 쓰레기 안 버리면 다 철학자 되냐고 묻는 거지.
He laughed, and I was relieved that he did. As Connie took the plates away,
교수님은 웃으셨고, 난 교수님이 웃어줘서 마음이 놓였어. 코니가 접시들을 치울 때,
미치가 던진 농담에 교수님이 빵 터지셨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미치가 위트 있게 잘 넘긴 거지. 간병인 코니가 식사 정리를 하는 평범한 풍경 속에 이런 깊은 대화가 오가는 게 참 인상적이야.
I noticed a stack of newspapers that had obviously been read before I got there.
내가 거기 도착하기 전에 분명히 이미 읽은 게 분명해 보이는 신문 더미를 발견했어.
교수님은 몸이 불편해도 세상일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셔. 미치가 오기 전에 벌써 신문을 정독하셨나 봐. 지적 호기심만큼은 루게릭병도 못 막는 거지. 대단하지 않아?
“You bother keeping up with the news?” I asked. “Yes,” Morrie said.
“뉴스 챙겨보는 거 귀찮지 않으세요?” 내가 물었어. “응, 챙겨보지,” 모리 교수님이 말씀하셨어.
미치가 보기에 몸도 가누기 힘든 교수님이 굳이 세상 돌아가는 뉴스까지 챙겨보는 게 신기했나 봐. 어차피 침대에만 계시는데 세상 소식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슬쩍 던진 질문인데, 교수님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시네. 지적 호기심은 병도 못 막나 봐!
“Do you think that’s strange? Do you think because I’m dying, I shouldn’t care what happens in this world?”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교수님이 미치의 속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어.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인데 세상 소식이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걸 정면으로 물어보시니까 미치가 좀 뜨끔했을 거야. 교수님 통찰력 무엇?
Maybe. He sighed. “Maybe you’re right. Maybe I shouldn’t care.”
그럴지도요. 교수님은 한숨을 내쉬었어.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내가 신경 쓰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지.”
미치가 솔직하게 대답하니까 교수님도 잠시 수긍하는 척(?) 한숨을 쉬셔. 진짜 신경 안 쓰겠다는 게 아니라, 미치의 관점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시는 거지. 죽음을 앞두고도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는 교수님의 유연함이 느껴져.
“After all, I won’t be around to see how it all turns out. But it’s hard to explain, Mitch.”
“어쨌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끝까지 지켜보려고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 미치.”
교수님도 현실은 잘 알고 계셔. 결말을 못 볼 영화를 굳이 중간까지 열심히 보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지. 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그 '뉴스를 보는 진짜 이유'가 뒤에 이어질 거야. 궁금하지?
“Now that I’m suffering, I feel closer to people who suffer than I ever did before.”
“이제 내가 고통을 겪고 있으니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전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야.”
교수님이 직접 아파보니까 세상의 아픈 사람들이 다 남 같지 않게 느껴지시는 거야. 예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했다면, 이제는 가슴으로 팍팍 와닿는다는 거지. 고통이 오히려 타인과 연결되는 와이파이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셈이야.
“The other night, on TV, I saw people in Bosnia running across the street, getting fired upon, killed, innocent victims...”
“요전날 밤에 TV에서 보스니아 사람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가다가 총격을 받고 죽임당하는 걸 봤어, 무고한 희생자들 말이야...”
교수님이 보스니아 내전 영상을 보셨나 봐. 몸이 아파서 하루 종일 침대에 계시다 보니 세상의 비극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거지.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도 그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 자기 일처럼 느껴져서 마음 아파하시는 장면이야.